이경아 <욥의 초상> 중에서
07 Jun 2004 No Comments
in 책

슬프도록 날씨가 좋은 날이면
생각나는 얼굴이 되고 싶다.
볼만한 연극이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같이가서 보고픈 사람으로,
좋은 음악감상실의 개업화환 앞에서 공중전화를 하여
불러낼 수 있는 그런 이름으로 간직되고 싶다.
늦은 비가 땅을 파고 있는 새벽에도
선뜻 다이얼을 돌릴 수 있는
전화번호의 주인이 되고 싶다.
교양있는 사람이라고,
특별히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나를 아는 이들에게 기억되기보다는
무던하고 포근한 솜이불같은
평범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같이 다니면 창피하지 않을 걸음걸이로,
같이 걸으면 앞서거나 뒤쳐지지 않을 보폭을 갖고
누구에게나 잘 어울릴 수 있는
무난한 색상을 띤 친구이고 싶다.
그래서 그네들의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덮어주고,
종각에서 시청까지 아무말없이 걸어도
심심하거나 부담스럽게 생각되지 않는
포근한 색상을 가진 아이라고 이름지워 불리고 싶다.
때로는 엄지손톱 밑을 파고 들어가
체중을 뚫는 바늘처럼
피같은 땀, 피같은 눈물에 흠씬 나를 적시울 수 있는
날카롭고 곧은 친구 몇 명을 지닌
행복한 욥이 되고 싶다.
아니 단 한 명이라도 좋다.
변해가는 세상에 조금씩 채색되는 스케치북 위에서
쉬지않고 계속 굴러가는 손수레 바퀴를 닮은 삶으로
그려지기 위해 노력하며,
바퀴의 안쪽에서 어떠한 속도에도 움직일 줄 모르는,
결코 부동의 자세로 있는 바퀴의 축을 닮은 믿음하나
가슴에 간직하고서 열심히 살아가는
욥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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